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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80년대 전두환정권에서 어느 공무원이 그랬듯이... 누군가 나서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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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보수 우익의 뿌리를 생산한 전두환 정권은 놀랍게도 경제에서만큼은

 역대 그 어떤 정권보다도 좌파적 입장을 취했으며, 빈부 격차를 최소화하며 가장 안정적인 경제 성장을 달성했다는 것인데, 

믿기 힘들겠다는 분은 아래 블로그에 수치가 잘 나와 있으니 살펴 보시길. 
http://xfelix.egloos.com/2383353



대체 어떻게 한 걸까? 

전설이 된 천재 공무원, 故 김재익 노력 덕분이었다

김재익. 

전두환 정권 시절 청와대 경제 수석이었던 분으로,

 일반 대중들에겐 1983년 10월 9일 아웅산 테러로 사망한 고위 공무원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45세의 젊은 나이에 숨지지 않았다면

 김재익은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을 것이란

 평가가 지배적일 정도로 김재익이 80년대 한국의 경제 발전에 끼친 공로는 지대하다. 

일단 뭣 때매 이 난리인지 시대 상황을 대충이나마 살펴보자.  


"김일성 밑에 가서도 일할 놈"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말기의 한국의 경제 상황은 말 그대로

 

 작두날 위에선 무당마냥 조마조마했다고나 할까. 성장에 목숨 걸었던

 

한국 경제는 18년간 고질적인 경기 과열과 인플레이션에 몸살을 앓고 있었는데

 

 

 

거기에 오일 쇼크까지 겹쳐 아주 환장을 할 지경이었다. 

 

 

게다가 수없이 많은 저소득 노동자들은 말할 수 없이 비참한 근로 환경에서 일을 해야 했으며,

 이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권력층은 썩을대로 썩어 누가누가 더 많이 해먹나 부패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

 당시 경제기획원에서는 시장을 개방하고 성장보다는

 안정화 시책을 쓰자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대기업과 부패 공무원들을 등에 엎은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뚝딱 뒤집어 엎으시고 다시 대기업 위주의 성장 정책으로 회귀하시려다 총격에 숨을 거뒀다.

 

이런 상황에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뭔가 문제가 많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뭐부터 해야 할지 알수가 없었다.

 누군가 경제를 잘 아는 사람에게 맡기고 싶었을 뿐.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김재익이었다.

 당시 경제 기획원에서 근무하다가 보따리 싸고 학교로 돌아가려고 했던 김재익을 전두환이 불렀던 것. 


 


당시 지식인들에게 전두환은 하극상에

사람을 죽이고 정권을 잡은 백정같은 인물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런 백정 밑으로 기어들어가다니. 

당시 대학생이었던 아들이 애비에게 극렬 항의했다.

이에 김재익은 이렇게 타일렀다.


 


"경제의 개방화와 국제화는 결국 독재체제를 어렵게 하고

시장경제가 자리잡으면 정치의 민주화는 자연히 따라온다."

 


김재익의 아내는 주변 사람들에게

 "김재익은 김일성 밑에 가서도 일할 놈"이란 말까지 들었다고 한다.

 김재익은 이 말을 전해듣자 이렇게 답했다. 

 


"만약에 내가 김일성을 설득시켜 그 사람의 생각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으면 해야지."

김재익은 자신을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임명하려는 전두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제가 생각하는 경제 정책은 인기도 없고 기존의 세력들이 환영하지도 않습니다. 그래도 저를 쓰겠습니까?" 

 


그러자 전두환이 했던 유명한 말.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실제로 그랬다.

 김재익은 그 이후로 3년간 대한민국의 경제를 좌지우지한

 경제 대통령이 되었다. 이는 전두환에게는 물론, 대한민국에 엄청난 행운이었다. 

박정희_경제_2.jpg
성장 지상주의 마약에서 벗어나다 

김재익은 제일 먼저 인플레이션 잡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개방화가 필수적이었다. 인위적인 가격 안정책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값싸고 질 좋은 외국 제품을 다량 들여 와야 근본적인 물가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제는) 수출보다는 수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0년간 수출 지상주의에 목매던 박정희 시대 경제 정책을 180도 뒤바꾼 것이다.

 지난 20년간 투기업자, 대기업들을 위한 성장 위주의 보호 정책이 서민들을 위한 개방 정책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김재익은 임기 동안 과감한 수입 자유화 정책 시행했고

 지속적인 긴축 정책 실시, 전두환 정권 내내 안정적인 물가를 유지했다.

 "전두환이 다른 건 몰라도 물가는 확실히 잡았다"는 말이 있는데, 전두환이 아니라 김재익이 잡은 거다.


 


김재익은 철저한 자본주의자에 자유시장경제 체제 옹호자였다.

그에겐 서민들을 위한 물가 안정도 중요했지만

그보다는 수입 자유화를 통해 한국 기업이 외국 기업들과 경쟁하고,

장기적으로 막강한 자생력과 경쟁력을 가지게 만드는 것이 더 중요했다. 

"우리는 앙심을 먹고 돈을 안 풀기로 했다... 우리는 이제 개방화로 간다.

 물론 초기 단계는 무역 자유화이고, 다음은 자본 자유화다." - 김재익


 


수출 지상주의와 함께 박정희 시대를 지배했던 또 하나의 이념은

 "대기업 중심의 고도 성장"이었다.

김재익은 이런 성장 지상주의의 경제 개념을 뒤바꾸어 버렸다. 

그는 대기업을 위한 차별 금융제도, 세제혜택 철폐를 주장했다

. 대기업의 독과점을 막기 위한 공정거래제도 채택까지 주장했다.

 그리곤 중소기업 진흥 재단 집중 지원했으며, 벤처 기업 육성 강조했다. 

"이제는 20대 재벌기업을 지원하는 정책을 앙심 먹고 철수하려 한다.

그 1500배에 달하는 3만여 개의 중소기업이 뛰놀 마당을 만들어야 한다" - 김재익


미래를 내다 본 공무원


80년대 당시 청와대 출입 기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재익은 참으로 신비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1980년에 이미 20년 뒤에나 가능할 지하철과 버스를 연계하는

 대중 교통 시스템과, 전자 통신 기술로 발생할 정보 산업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냥 이야기에 그친 것이 아니라, 그는 실제로 국가발전의 원동력을 IT로 삼았다.

 그는 1980년 전자/정보 통신 산업이 5년 안에 2배 성장하고

한국의 차세대 제1 산업으로 발돋움 할 것이라 주장했다. 


 


그는 이미 70년대 후반 경제 기획원에 있을 때부터

 전화기의 자급제를 실시를 주도했다.

 기계식 전화기에서 전자식 전화기로 전환토록 한 것도 김재익의 노력이었으며,

세계 최고 수준의 전화 네트웍을 전국에 구축케 한 것도 김재익의 노력이었다. 이후 컬러TV 송수신을 자유화한 것도 김재익이 주도한 일. 

김재익은 오명과 홍성원 공학박사를 정보통신 산업담당 경제비서관으로 임명하고

 정보통신 산업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이렇게 김재익이 구축한 정보통신 산업 개발을 위한 시스템은

 그가 죽은 후에도 계속 이어져 김대중 시대에 와서 그 위력을 실감하게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르짖은 동북아 경제 허브論 역시 원래는 김재익이 구상한 것이다.


 


김재익이 구상한 것은 싱가폴이 모델이었다.

 싱가폴처럼 한국은 동북 아시아의 금융 센터로 발돋움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김재익은 실제로 외국 금융 자본 유치에 결정적 기여했으며, 한미은행과 신한은행의 탄생을 가져온다. 

김재익은 외채, 외국 자본의 도입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외채에 대해서는 대학생들의 거부 반응이 있다.

경제 종속으로 망국의 위기를 부른다는 논리다. 이건 잘못된 판단이다.

 한세기 전 영국의 발전과 비교하여 절망적이라던 독일이 일어난 것은 바로 해외자본 투자 때문이다..."


 

File:Stockholm old town 2002.jpg
"하나의 모델이 있다면 그건 스웨덴이다.

 인구 8백만의 이 북유럽 복지국가는 오랫동안 1인당 GNP 최상위 국가에 있다.

 해외 자본 투자 덕이다. 이 나라에서 가장 수익을 많이 올리고 있는 회사는 바로 IBM이다.

 이 회사를 통해 수십 명의 최고급 기술자가 배출된다. 세금도 제일 많이 낸다." 


자본주의자 김재익 

김재익이 가장 싫어했던 건 온정주의적인 반자본주의 정책이었다.

 그 중의 하나가 이중 곡가제였다. 추곡 수매라고도 하는 이 이상한 제도는

 농부들에게 쌀을 비싸게 사서 시장엔 싸게 내놓는 건데 이 때문에 정부의 재정은 피폐해지고, 농부들은 무작정 쌀만 키우고, 그것도 질보다 양으로 승부하고, 그러다 보니 쌀값이 폭락해 모두가 공멸하는 참 공산주의스러운 정책이었다. 

김재익은 이중 곡가제와 같은 농촌 보조 정책이 정부의 재정 적자를 심화시킬 뿐 아니라,

 결국 농촌을 망하게 한다고, 어서 빨리 철폐하고 농촌의 자생력을 위해 투자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근데 아무도 안했다. 여전히 한국의 농촌은 수입의 70%를 정부 보조금으로 의존해 사는 식물인간 조직이다.

 태반의 농민들이 아직도 (수입 자유화가 되지 않은) 쌀만 키우고 있으며,

 여전히 질 좋은 쌀보다는 양 많은 쌀을 생산하고 있으며,

그래서 매년 쌀 100만톤은 내다 버리거나 창고에 처박아두고 있으며,

 쌀 수입 소식이 들려오거나 보조금 정책이 바뀐다는 얘기만 들으면

 우르르 상경해 시청 앞에서 목숨 걸고 시위를 한다. 


지금까지 정부가 농촌에 들이 부은 보조금만 해도 뉴질랜드 북섬 하나는 샀을텐데,

 이 돈으로 농민들을 보조금에 목숨 건, 시장이 개방되면 모두가 죽어버릴, 

식물인간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반자본주의 온정주의 정책의 최후가 이런 것이란 걸 김재익은 미리 알고 있었다. 

기업과 정부의 극렬 반대에 맞서 부가가치세를 채택-유지한 것도 김재익이었다.

당시 김재익이 미친놈 소리까지 들어가며 사수한 부가가치세는

 오늘날 정부 예산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세목 중 하나가 됐다.


 


금융 실명제 가장 처음 추진한 것도 김재익이었다.

지하 경제를 청산하고 깨끗한 경제 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만들었던

금융 실명제는 당시 대기업과 정치인 등 '비자금'을 다뤄야 하는 이들로부터 엄청난 반발을 샀고,

결국 전두환에 의해 최종 좌절됐다. (아다시피 이 법안은 20년 뒤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에야 실시됨.)


 


김재익은 자동차 산업의 발전에도 기여했다.

 80년대 초반 자동차 산업의 마이너스 성장으로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국은 내수 시장이 작아 자동차 산업을 포기해야 한다"고 조언했음에도,

 그는 역으로 자동차 산업에 집중 투자할 것을 주장했다.

 "공직자 승용차 자가 운전제"를 주창하며 스스로 차를 몰고 다녔고, 자동차 시장 내수 창출에 진력했다. 



 

철저한 자본주의자, 개방과 세계화를 기조로 삼는 자유시장경제 옹호자였으면서도

 김재익은 되려 부의 공정한 분배에 기여했다. 

 


1980년 이전 하위 40%의 전체 소득 비율이 16.1%이었던데 반해,

 김재익의 사망 당시 1984년엔 18.9%로 향상됐다.

반대로, 상위 20%가 차지하는 소득은 1980년 45.4%에서 1984년 42.3%로 감소했다.


 


고속 성장에 물가 안정. 부의 공정한 분배까지.

 김재익이 이룩한 80년대 대한민국의 경제 태평성대는

 (전두환의 장기 집권을 가능케 해주긴 했지만) 무엇보다

 대한민국의 경제 체질 개선시키고 미래 산업 동력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하겠다.


 


김재익이 아웅산 테러로 사망하지만 않았더라도 아마 더 많은 것이 개선됐을 거다.

 금융 실명제야 전두환이 돈 빼돌리느라 영영 시행이 안됐겠지만,

 피폐한 농어촌, 대기업의 극심한 착취 구조, 적자투성이 복지 재정 등

 현재 한국을 병들게 한 고질적인 문제들이 80년대에 이미 해결이 됐을 거란 얘기다.

 딴건 몰라도 한국 대기업의 더러운 착취 문화만큼은 김재익이 "앙심 먹고" 척결했을게다. 

우장춘 박사가 거지나라 한국을 기아에서 구원했다면,

박태준이 농촌국가 한국의 산업 기반을 구축했다면,

김재익은 한국 경제의 정의를 구현하고 미래 성장 동력을 구축했다.


 



3-4년 남짓한 그 짧은 기간 동안 말이지.

 그가 죽지 않고 전두환 정권과 내내 운명을 함께 했다면 어땠을까.

김재익의 후광에 의해 전두환은 학살자에서 영도자로 자리 매김했을까? 



참고로, 김재익은 개인적으로도 말도 못하게 청렴한 인물이었다.

 청와대에 있는 동안 김재익에겐 인사청탁이 끊이질 않았는데,

 아무리 가까운 지인이 보낸 지원자라도 이렇게 돌려 보냈다고.

"당신의 (취업하려는) 그런 접근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바로 그런 자세 때문에 일자리를 알아봐 줄 수 없겠다."

김재익의 어머니가 사망한 뒤 그분의 옷장엔 엄청나게 많은 이력서가 발견됐다고 한다.

 워낙 꼿꼿한 아드님이신지라 아무리 인사 청탁이 들어와도 어머니는 아들에게 아예 말도 꺼내지 않았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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